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의 북벌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> 힘을 다하여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멈추겠다(鞠躬盡瘁, 死而後已).[* [[출사표#s-1.2.2|후출사표]]에 제갈량이 올린 표현 중 아주 유명한 부분이다.] 중국 [[삼국시대(중국)|삼국시대]] [[촉한]]의 재상 [[제갈량]]이 6년간 주도한 위나라에 대한 공격이자, 소설 [[삼국지연의]] 후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건. 보통 삼국지 관련 매체는 웬만하면 북벌의 종결인 추풍오장원까지만 진행하고 마무리를 짓기 때문에 이 뒤에 남아있는 수십 년의 내용은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. 삼국지연의 본편은 제갈량 사후도 다루긴 하지만 내용이 매우 부실하기 때문에 대충 얼버무렸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. [[후한]] 말 [[황건적의 난]](184년)부터 [[서진]]의 [[삼국통일]](280년)까지의 이야기 중 [[제갈량]]의 사망(234년)은 시간상으로는 거의 중간에 놓이지만, 연의에서 다루는 제갈량 사후의 분량은 전체 분량의 1/8 ~ 1/10 정도이기 때문이다. 결론부터 말하자면 [[유비]] 사후 [[제갈량]]은 그의 유지를 이어[* 나라 이름을 한나라로 한 이유가 바로 찬탈당한 헌제의 유지를 잇기 위해서다. 그러니 북벌은 나라의 존립 이유. 촉이라고 부르는 건 후세의 사람들이 편의상 부르는 거고 실제 명칭은 한이다. 물론 당시 사람들도 원래 한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촉한이나 계한 등 다른 이름을 썼다.]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 번의 북벌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했고,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[[오장원]]에서 쓰러졌다. 흔히 '[[육출기산|육출기산(六出祁山)]]'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다섯 차례의 출병이 있었으며 기산 방면으로 출병한 건 2번(1차, 4차)이다. [[육출기산]]이 된 이유는 3차와 4차 사이에 창작 [[기산]] 전투가 추가되었고 2, 3, 5차 북벌도 전부 기산에 한 번 이상 진출한 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. 2, 3, 5차의 경우 [[기산]] 방면이 아니라 관중과 사천 지방 사이의 평지로 진출했다. 결국 제갈량의 북벌은 일부 성과는 얻었지만 궁극적 목적인 북벌은 실패했으며, 이후 북벌정책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[[비의]] 시대를 거친 후 [[강유]]가 유지를 이어받아 재차 6~7차례의 북벌을 시도하게 되나 이들도 모두 실패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